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와무라 에이지 (문단 편집) == 과대평가된 투수? == 사와무라의 평가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거인군의 창단 멤버이며 전쟁에 징집되어 죽었다는 드라마틱함[* [[군국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영향이 크다. [[전쟁범죄|전범]] 합사 문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사와무라 에이지의 위패가 '전몰자' 신분으로 안치되어 있을 정도.] 때문에 미화된 선수라는 것. 우선 당시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 선발 팀이 제대로 플레이했는가부터 의문점이 남는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지금보다 훨씬 힘든 시기여서 장거리 원정을 오는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가 지금보다 매우 힘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1930년대 [[FIFA 월드컵]] 예로 들면, [[유럽]]에서 할 때에는 [[남아메리카|남미]] 팀들이 부진했고 남미에서 할 때에는 유럽 팀들이 부진했(거나 아예 참가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와무라의 경기 기록을 보면 저 1실점 패전도 있지만 10점 이상 두들겨 맞은 시합도 있고,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18전 전패했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의 책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에서 인용된 구보타 지로의 '손안에는 언제나 풀하우스'의 내용을 보면 당시 10번째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냥 적당히 봐주다가 [[루 게릭]]이 [[홈런]] 한 방을 쳤다고 한다. 사와무라의 구속이 정말로 빨랐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남아 있는 비디오를 가지고 계산했을 때 159.4km/h라고 밝혔지만, 당시의 필름은 초당 16프레임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에게 가기까지 0.44초가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측정하는 데 쓰인 필름은 절반인 8장 정도라 볼 수 있는데 이 중 던지는 순간과 받는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오차는 최대 20km/에 달한다. 실제로 당시의 잡지에는 130km/h라는 기록도 있다. [* 당시에는 속도 측정기구가 전무하다 시피해서 실제 측정기록은 없다.] 당시 체계적인 훈련이나 코칭도 없이 이 정도 구속이면 상당한 수준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시즌 기록을 보면 일본의 모든 투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튀어나와 있다고 해도 될 만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MVP였던 37년 춘계 시즌(만 20세) 30경기 24선발 24완투 7완봉 24승 4패 244이닝 196K ERA 0.81 WHIP 0.84 노히터 2회로, 당시 춘추시즌제는 각 56게임제이니 저게 56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쓴 기록이다. 56경기 동안 이틀에 한 번씩 완투해서 244이닝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것. 비록 활약한 기간은 짧지만 확실히 당대 일본 최고의 투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게 곧 메이저리거급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대 미국과 일본의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실력 차를 감안하면, 아무리 메이저리거 선발 팀이 설렁설렁 플레이했다고 할지언정, 프로야구도 없는 나라의 고교생이 1실점 완투패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당장 한국의 고교생이 단 한 경기라도 설렁설렁 플레이하는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로 1실점 완투패를 했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다. 실제로 21세기 현재 [[아시안 게임]]을 보면 프로야구나 [[실업야구]] 선수가 출전하는 [[일본]], [[한국]], [[대만]]과 그렇지 못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 등의 나라들의 실력 차는 어마어마해서 10점 차는 기본으로 나오고 20점 차 이상도 심심찮게 나온다. 사와무라가 완투패를 했을 때는 일본은 프로야구가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미국과 미국 외의 야구 실력의 차이가 더욱 크던 시절이었기에, 실제로 과대평가 논란이 여러 번 있었고 기록을 통한 재평가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사와무라의 평가는 크게 변하지 않고, 일본 구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결론은 전쟁과 요절로 인한 드라마성이 가미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걸 빼고 생각하더라도 사와무라는 당대의 탈일본급 투수였으며,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로 단 한 게임이라도 시합다운 시합을 펼쳐보일 수 있는 유일한 투수였다. 그것도 고교생 신분으로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투수였네 하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맞지만, 그런 감상적인 평가나 과장을 제쳐두고 야구 내의 기록과 업적만으로 따져보아도 대투수가 맞기 때문에, 사와무라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은 전부 죽어서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어 남겨진 기록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 오늘날에도, 사와무라 에이지가 전설적인 투수라는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